국민대학교 유라시아 연구소 :: 현대 러시아어의 앙글리시즘

현대 러시아어의 앙글리시즘 - 정하경

작성자: evrazia

조회: 4007 등록일: 200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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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 style="TEXT-ALIGN: center">현대 러시아어의 앙글리시즘</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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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right"><STRONG>정하경 (서울대학교) </STRONG></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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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justify">언어 접촉(language contact)으로 발생하는 언어 변화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어휘적 변화(lexical change), 그중에서도 차용어(borrowings)의 발생이다. 언어 접촉이라는 것은 결국 상이한 언어의 사용자 혹은 언어 공동체 사이의 교류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문화간 접촉을 수반하고, 이러한 경우 정치, 역사, 경제적 요인에 따라 접촉 문화에 대한 상대적 가치 평가가 따르게 된다. 우스펜스끼와 같은 문화학자들이 언급하듯이, 접촉한 타문화가 자문화보다 특권적(prestigious)으로 여겨지는 경우 그 문화에서 사용되는 어휘의 직접차용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게 된다. 물론 타문화의 어휘의 차용이 반드시 그 문화의 가치적 평가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문화에는 없지만 저 문화에는 존재하는 아이템을 지칭하는 표현이 그대로 수입되는 경우 문화의 가치적 평가와 무관한 경우는 빈번하다. 예를 들어 영어 사전에 kimchi 라든가 chaebol 같은 단어들이 등장한 것은 한국 문화에 대한 가치 평가와 상관없이 이 어휘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고유성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렇게 그 원어표현을 대신할 말이 딱히 없는 경우에 일어나는 차용은 개별 어휘 단위로 이루어지며 특정 영역에 국한된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접촉문화에 대한 가치적 평가의 결과로 차용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의미적으로(semantically) 유사한 혹은 동등한 모국어 단어가 존재하는 경우에도 화용적(pragmatic), 문체적(stylistic)인 차이 때문에 차용어를 사용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즉 지시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체적 필요에 의해 차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서 현재에 이르는 동안 증가해 온 현대 러시아어의 앙글리시즘(англисизм)은 이러한 타입의 어휘차용의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경우 집중적인 앙글리시즘의 근원은 영국 혹은 기타 다른 영어권 국가/문화 보다는 미국 문화와의 접촉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미국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앙글리시즘은 비단 러시아어에서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세계의 비영어권 국가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대규모의 차용은 타문화의 접촉 증가와 가치적 판단을 기반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정치, 경제적으로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미국의 영향이 큰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한국어보다 러시아어에서 앙글리시즘이 현저해 보이는 이유는 일단 러시아어와 영어가 많은 단어들이 어원적 유사성을 보이는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등 두 언어가 보다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련 붕괴 이후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미국 문화의 영향이 근세기의 짧은 기간 동안 급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용의 양상은 그 접촉 언어에 대한 친숙함의 정도, 그리고 화자들의 외국어에 대한 태도(배타적 vs. 지향적)에 따라 달라진다. 먼저 차용어휘(구)의 의미적 형태/단어 구조를 분석하여 그 구성단위를 그에 상당하는 모국어 표현으로 치환하는 번역차용(calque)이 있다. Home theater와 같은 표현을 러시아어 표현으로 치환하여 домашний театр라고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러한 번역차용은 외국문화의 새로운 컨셉을 모국어 표현으로 치환함으로써 그 의미구조를 모국어 화자에게 좀더 명확하고 투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모국어의 시스템에 맞지 않는 표현을 배격하고 언어적 고유성을 지키고자 하는 국수주의적(nationalist), 순수주의적(purist) 동인에 의한 경우가 많다. 접촉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호의적 지향과 광범위하고 양적으로 현저한 문화 유입에 따라 접촉 언어에 대한 친숙도가 높아지는 경우, 번역차용이 아닌 직접차용, 즉 외국어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음차하는 경우가 증가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외국어 표현과 의미적으로 등가적인 표현이 모국어에 있다 하더라도 외국어 표현이 가지는 문체적 차이 때문에 외국어 표현이 선호된다. 대다수의 언어 공동체 구성원들이 영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영어에 보다 익숙해진 현대의 화자들에게는 보수적인 차용방식인 번역차용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번역차용은 직접차용이 전달하는 정교한 문체적/문화적 함의를 지닐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домашний театр라는 번역차용 표현 뿐 아니라 영어단어를 음차한 хом театр라는 표현이 현대 러시아어에서 함께 사용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shopping이라는 영어단어를 посещение магазина 등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가능함에도 굳이 шоппинг으로 직접차용하게 되는 것은 의미적 전달의 필요에 더하여 서구적인 (실은 미국적인) 쇼핑문화에 대한 함의를 전달/과시하기 위해서이다.       외국어 표현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단계는 외국어 표현을 형태적, 문법적으로 모국어 체계에 통합하는 과정이다. 러시아어에 유입된 외국어 명사의 경우 성(gender)을 할당해야 하며 어떤 곡용 패턴에 참여시킬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러시아어 체계에 끼워넣기 어려운 경우에는 비곡용 명사로 남기도 한다. Джинсы는 소비에트 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고전적인 예이다. 오리지널한 영어표현인 jeans는 복수의 곡용어미 -s가 첨가되어 있는 형태이나 러시아어에 들어온 후 다시 러시아어의 복수 명사어미인 -ы 가 붙게 된 것이다. 이 단어의 잉여적 형태는 차용어를 모국어의 패러다임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사의 경우는 어떠한가? парковать와 같은 단어는 영어의 park에 동사파생접미사인 -ова-와 동사어미인 -ть를 부가함으로써 영어의 동사를 러시아동사의 형태 체계에 맞도록 파생시켜 차용한 경우이다. 특히 이 -ова- 접미사는 동사 차용에 있어 가장 생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접미사로 대부분의 영어 동사는 이 접미사를 사용함으로써 러시아어의 동사형태화 될 수 있다. 영어단어의 직접적인 차용은 비즈니스 및 경제활동, 혹은 정치 영역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бизинес (business), каммиссионер (works on commissions), дилер (dealer), менеджер (manager), франчаизи (franchisee), консенсус (concensus), консолидация (consolidation), плюрализм (pluralism), приватизация (privatization) 등, 영어 단어들이 최소한의 러시아어화 과정을 통해, 즉 명사화 접사나 동사화 접사를 덧붙임으로써 러시아어 체계에 통합되고 있다. 새로운 지시적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경제/정치 용어 차용과 달리, 일상어에서의 차용은 의미적, 가치적 이화(differentiation)를 보여주는 현상으로서 그 양상이 매우 흥미롭다. 차용된 어휘들은 본래의 의미에서 이탈하거나 혹은 보다 특화된 의미를 지니면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аскать와 같은 동사는 영어 동사 ask에서 온 것이지만 '거리에서 돈을 구걸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동사 наитать는 영어 명사 night로부터 '밤을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로 차용되었다. 온라인 게임의 확산과 함께 영어 단어 game이 '온라인/컴퓨터 게임을 하다'라는 의미로 특화된 гаматься로 차용된 것 역시 비슷한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шузы 는 원래 영어 명사인 shoes가 지니는 중립적이고 일반적인 의미와는 달리 '값비싸거나 화려한 신발'을 지칭하는 단어로서 러시아어 어휘인 ботинки, ообувь 등과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차용어가 같은 의미 영역에 속하는 모국어 어휘들과 더불어 의미적 세분화, 가치적 이화를 일으킨 것이라 하겠다. 일상 문화 층위에서 차용되는 어휘들은 젊은 층을 주 타겟으로 하는 매스미디어 및 인터넷을 매개로 하여 대도시를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언어와 이데올로기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상관관계에 있다. 이 상관관계는 단순하거나 획일적이지는 않아서,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소위 안티 아메리카즘이 러시아인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다 할지라도, 일상 생활의 층위에서 혹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미국 문화의 영향력이 높은 만큼, 영어 어휘의 차용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이데올로기가 언어 변화의 방향을 주도하기도 하지만 언어변화 또한 특정 이데올로기를 확산, 증폭하는 데 기여하기 마련이다. 영어단어의 차용은 일상 생활 및 경제활동의 영역에서 영어권 문화에 대한 가치 판단의 결과이자 그것을 한시적으로 더욱 확산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이것이 러시아어, 나아가 러시아인의 세계관에 모종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을 것인가? 러시아어 화자들이 다량의 외국어 어휘를 차용하게 된 것이 러시아어의 역사에서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8세기와 19세기 초, 귀족 계급에서는 프랑스어가 보다 문화적/문학적인 언어로서 사용되었고, пальто '외투' 와 같이 프랑스어에서 유입된 어휘들도 현대 러시아어에 남아 있다. 그러나 외국어의 대량 차용이 자국어를 오염, 변질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순수주의자, 혹은 민족주의자들의 염려와는 달리 차용된 프랑스어 어휘들은 완전히 러시아어화되었고 그것이 러시아어에 어떠한 기능적, 가치적 훼손을 가져온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현대 러시아인들의 정신세계가 18-19세기에 유입된 프랑스어의 영향으로 어떤 친프랑스적인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어의 많은 어휘들이 중국어에서도 사용되는 한자어라는 사실이 현대 한국어의 어떠한 기능적, 가치적 면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권력기관에 의한 인위적인 언어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언어변화, 특히 차용이란 것은 지시적이건 문체적이건 간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필요에 의해 촉발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다. 외국어에 기원을 둔 러시아어 단어와 순수 고유 러시아어 단어를 가치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지는 언어학적으로 다룰 수 없는 사안이며, 그 둘을 가치적으로 구별해야 할 것인지는 더더욱이나 언어학과 과학의 영역 밖의 문제이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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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TYLE: italic; mso-fareast-font-family: 바탕" lang=EN-US><STRONG><인터넷 칼럼>에 게재된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STRONG></SPAN></P>
<P style="TEXT-ALIGN: center" class=바탕글><SPAN style="FONT-STYLE: italic; FONT-FAMILY: 바탕"><STRONG>유라시아 연구소의 공식견해가 아님을 밝혀둡니다.</STRONG></SPAN></P></DIV></DIV>